BC 3300 - 1300 인더스문명
BC 900 - 500 베다시대
BC 800 - 300 16대국시대
BC 520 페르시아의 침공
BC 326 알렉산더대왕의 침공
BC 322 - AD 185 찬드라 굽타 마우리아 왕조 (아쇼카왕;불교)
AD 105 250 쿠샨왕조 ; 불교 전파
AD 280 - 550 굽타 왕조 ; 힌두교 (브라만교+불교)
AD 550 - 1206 지방왕조 시대 (카주라호 사원군 등)
AD 1206 - 1526 인도 이슬람제국 ; 델리 술탄 왕조 (북인도 장악) - 꾸뜹미나르 등
AD 1526 - 1858 무굴제국 (바부르,후마윤,악바르,자항기르,샤자한,아우랑제브)
AD 1859 - 1947 식민지 시대
AD 1947 인도 독립 (파키스탄 분리)
인도의 역사
BC 4세기경 인도에서는 최초의 통일된 국가가 나타난다. (시조는 찬드라굽타 마우리아), 3대 째인 아쇼카 시절에는 남부 일부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통일을 한다. 아쇼카는 최후의 전쟁에서 대학살을 자행했다고 한다. 그때 대오각성을 한 듯 불교에 심취하였다.
마우리아 조는 아쇼카 왕 이후에 급격히 분열이 되고, 600여년간 중국 북방계로 추정이 되는 쿠샨 조 와 훈족의 후예 악훈 정도가 인도 북방에서 부분적인 통일을 이루었다. 두 국가는 불교를 국교로 삼았지만 사회의 기운은 차츰 브라만의 차별이 다시 고개를 드는 추세였다.
기원후 320 년부터 200여년간 번영을 누린 굽타 왕조가 나타나는데 이때 비로소 힌두교가 완성의 경지에 이르러 꽃이 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마우리아조의 아쇼카 이후에 완강하게 차별을 주장하는 브라만이 다시 힘을 얻게 되었지만 번성한 불교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결국 브라만교와 불교의 결합 그리고 인도 풍토에 적응하기 시작한 것이 힌두교라 할 수 있다. 브라만교의 지나친 배타성이 불교의 영향으로 각기의 존재를 인정하고 모든 계층에 이런 경향이 개성적으로 받아들여 질 때가 힌두교의 탄생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윤회 사상이나 카르마 ( 업보 )는 브라만과 불교의 공통이다.
(마우리아 왕조와 굽타 왕조. 묘하게 두 왕조의 창시자의 이름이 같다. 찬드라굽타가 그 이름이다)
이슬람의 침공
인도 중부 라지스탄 지역(원래 이름은 라지푸스탄)은 라지푸트족이 사는 땅이란 뜻인데, 투르크계로 짐작되는 라지푸트족은 7세기경 인도를 침공하였다, 라지푸트족은 아직 인도에 존재하면서 또한 인도의 풍토에 적응을 하여 일종의 무사계급 (크샤트리아)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라지푸트족은 그때부터 약 400년간 통일되지는 못했지만 수시로 다투면서 수많은 왕조로 합종연횡을 하면서 인도 북방부를 설치고 다녔다. 이 라지푸트는 독특한 무사계급의 행동양식을 이루었다. 호전적이고 약자에 대한 존중 그리고 조그만 명예를 손상하면 즉시 말보다도 행동으로 돌입되는 등의 중세유럽의 기사와 비슷한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평소에는 통일되지 못하고 수시로 다투었지만 외부 침략에 대해서는 가끔 행동통일을 하여 적을 물리치곤 했다. 인도 역사상 그런대로 보호막의 군사력을 갖춘 대표적인 카스트 계급이 등장한 것이다.
632년 알라의 사도 무하마드는 죽고 그의 후계자 아랍인들은 아라비아 사막을 박차고 나와 곳곳을 포교를 위한 전진을 시작했다. 이들을 흔히 사라센 제국이라 부른다. 이 무슬림은 특히 중앙아시아 쪽의 유목민( 주로 튀르크 계열 )들에게 포교에 성공함으로서 그들의 호전성과 잘결합이 되어 세계의 역사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인도에 최초로 침공한 무슬림의 아랍인은 인도의 신드지방을 유린하고 더 넘어가려고 했지만 라지푸트족에게 저지당하고 그쳤다. 이로부터 300년 후에는 이제 이슬람화한 튀르크계열 들이 본격적인 침략에 들어갔다. 주로 아프가니스탄 방향에서 내려오게 된다. 그 이후에 인도의 역사상 약탈과 살육으로 얼룩진 이슬람의 침공은 큰 규모가 네 차례가 있었다. 첫번째는 맘루크 계열의 가즈나 조朝 의 술탄 마흐무드로 그는 1001년을 출발점으로 20년간 무려 17회나 침공을 하고 인도를 유린하고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갔으며 그리고 인도의 펀잡 지방을 정복하고 침략의 거점으로 하였다. 두번째로 나타난 무리들은 구르 족(고르 족) 이였으며 가즈나 조의 지배하에 있다가 독립을 한 후에 가즈니를 쓰러뜨리고 칼끝을 인도로 향하였다. 1186년 모하메드 구르 술탄은 인도북부에 흩어져 있는 이슬람의 가즈니조의 유산인 여러 군소왕국을 차근차근 청소해 가면서 힌두스탄 평야를 향해 진격하였다. 당시에 라지푸트족은 가즈니의 침공 이 후에 안심하고 있다가 비로소 긴장을 하였고, 프리투비 라자 나는 영웅이 나타나 뭉치며 대항을 하였다. 첫 번째 조우에는 라지푸트족의 선방으로 일단 구르족은 물러났지만 1년 후 재침공 시에는 처절한 패배를 하였다. 이때 최소 라지푸트 전사 10만 명이 불타 죽었다고 한다. 이로서 라지푸트족은 멸절단계까지는 가지 아니했지만 최소 인도북방부에서 지킴이의 역할은 거의 상실하였다. 이후에는 인도 북부의 지배에 대한 주도권은 거의 토착왕조가 아닌 외부 침략자였다. 정복자 모하메드 구르는 본거지로 귀국한 후에 암살을 당했고 인도는 남아있던 그의 부하였던 맘루크 계의 여러 장군들에게 분열이 되어 버린다. (맘루크는 군인 노예를 말하며, 맘루크 계통이 권력을 장악했기에 노예왕조라 불려지는 그들은 델리를 중심으로 하는 이슬람 계통으로 델리 술탄 왕조라 역사에서 칭한다. 그 왕조들의 술탄들은 주로 델리 근방을 중심으로 통치를 하였고 가끔 힘이 날 때는 뱅골 지역이나 가끔 남쪽 데칸고원 부근까지 지배는 했지만 그 기간은 짧았고 또한 조금만 중앙에서 틈만 보이면 떨어진 지역의 총독들은 독립을 하였고 분리가 되었다. 중심부인 델리를 지배한 주인은 어지럽게 교체가 되었다. 할지왕조( 1290~ 1320 ), 투글루크 왕조( 1320~1413 ), 사이드왕조( 1414~ 1451 ), 로디왕조 ( 1451~ 1526 ) 등 튀르크 계열이나 아랍 계, 아프간 계 등의 흥망성쇠를 거듭하였다. 이 시기에 다시 큰 외부 침입을 맞는데 투글루크 조 시절 1398년에 나타난 티무르 (Tīmūr/Taymūr) 1336~1405 는 델리 근처를 유린하고 곳곳에 해골 피라밋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약탈과 살육을 하였지만 머물지는 아니했다. 이것이 인도로서 이슬람의 세 번째 침공의 경험이다.
하지만 16세기에 나타나서 인도를 침공한 무리는 조금은 틀렸다.
노예왕조를 알려면 이슬람의 노예제도를 이해해야 한다. 이슬람에서는 신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기 때문에 노예라고 해서 결코 자손대대로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며 일종의 주인과 계약직이며 또한 코란과 더불어 이슬람의 성경 중 하나인 하디스 에는 노예에 대한 예우도 적혀 있다고 한다. 그리고 계약이 끝나면 영구히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인에게 인정을 받으면 높은 지위까지 올라 갈 수 있다. 여러 종류의 노예 중 특히 군인 노예, 즉 싸움을 담당하는 노예가 있는데 이것을 맘루크라 칭한다. 원래 맘루크는 아랍어로 남자노예로 특히 튀르크 족이 많았다.
그런데 특히 유목민 출신인 튀르크 계열의 노예는 말을 잘 타고 활을 자유자재로 잘 쏘는데다가 용맹하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이슬람의 왕이나 귀족들은 튀르크계열의 군인노예를 선호하게 되어 맘루크란 말은 튀르크 계열의 군인 노예 란 뜻으로 차츰차츰 굳어지게 되었다. 이슬람교가 나타난 이 후에 처음에는 주로 전쟁은 아랍인이 직접 했지만 차츰 나약해지고 주로 튀르크 계열의 노예들이 대신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세도가들은 수만 명의 노예를 거느리는 경우도 당연히 많았고 군주( 이슬람의 왕 계통 )들은 더욱 많이 거느리고 있었다. 군인은 아무래도 무력을 쥐고 있기 때문에 왕을 가까이 할 수 있고, 또한 전쟁에서 큰 공훈을 세우면 더욱 실권이 커진다. 그렇다가 나중에 기회를 봐서 결국 국권을 탈취한다. 대체의 세계 역사상 무인정권은 대부분 위의 경우에 속한다고 보면 틀림없을 것이다.
중동의 역사상 이런 맘루크 들이 나라를 세웠는데 가장 성공한 왕조가 셋이 있다. 이집트와 시리아 부근의 광대한 영역을 소유한 《 맘루크조 1250~ 1517 》, 아프가니스탄 부근에서 인도까지 지배한 《 가즈니조 977~ 1186 》, 그리고 인도의 《 노예왕조 1206~ 1290 》가 그것이다. 물론 이외에도 중동과 인도에는 무수한 노예왕조가 있었지만 위의 셋은 대표적으로 성공하였고 넓은 영역을 차지한 왕조이다.
조朝를 이루었다는 것은 하나의 대로 끝나지 않고 대대로 이어졌다는 말이며 또한 권력을 쥔 맘루크 출신의 핏줄을 물러 받은 자손이 권력을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맘루크가 거의 찬탈 형식으로 계속 내려왔다는 뜻이다. 또한 이들의 명칭은 스스로 정한 것이 아니고 후세 역사가가 구분을 위해 임의로 쓴 것이다. 즉 맘루크는 원어 그대로, 가즈니는 아프가니스탄의 중심 지역이었고 노예왕조는 그대로 노예로 구분을 위함일 것이다.
무갈 또는 무굴 제국의 창시자 《 바부르 》는 티무르의 손자 격이다. 원래 아프가니스탄의 카불의 지배자였다. 후에 인도의 지배자가 되었을 때 스스로 몽골제국의 뒤를 이었다고 자칭했기 때문에 국호를 몽골이라 칭했는데 이 몽골이 와전이 되어 무굴, 또는 무갈 등으로 불리게 되었다.
인도에서 어지러운 왕조교체는 즉 중앙집권이 상당히 힘들었다는 것을 뜻했다. 왕조에서 총독으로 임명만 되면 수시로 독립을 하였고 지방분권화가 되었다. 이렇게 되면 춘추전국의 어지러운 시대이며 서로 합종연횡이 되풀이되기 쉬운데, 바부르가 인도에 등장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마지막 로디왕조의 펀잡 지역의 총독은 어지러운 정세 가운데 카불의 바부르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바부르는 기회를 놓치지 아니하고 인도로 들어 와서 로디왕조의 이브리힘 3세를 격파하였다. ( 1526년 )
이 후에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바부르 이후에 무굴 조는 잇달아 현명한 군주가 나타나 인도 거의 전역을 지배를 하는데 성공한다. 바부르는 여태의 지배자와 달리 파드샤( 인도식 황제 )라 칭했다. 그 이전까지는 대부분 술탄이라 불렀었다. 그리고 간과하기 힘든 것은 최소 바부르 정도이면 몽골의 피가 섞였다는 이야기가 가능할지 모르지만 그 이후에는 거의 튀르크화가 되어 몽골의 흔적을 찾기가 힘들다
바부르, 후마윤, 그리고 대제 ( 大帝 )라 불리는 악바르, 자항기르, 타지마할묘를 만든 샤자한, 그리고 아우랑제브 까지가 무굴조의 전성기를 일구어 낸 황제들이다. 샤자한 대에는 인류 역사상 가장 부유한 나라 중에 하나로 꼽힐 정도이다.
실질적으로 무굴 제국의 토대를 세운 평생을 전쟁으로 지세웠던 《 악바르 》는 종교에 관용적이어서 본바탕이 이슬람이었지만 그리스교도나 불교, 힌두교 등에 차별을 두지를 아니하였고 그들과 토론을 거쳐 만년에는 자신만의 독특한 종교를 창시하였다. 그리고 그 뜻을 이어 받아 뒤의 군주는 이슬람과 힌두 등의 종교에 차별을 두지 아니했다. 그러나 아우랑제브( 1658~ 1707 )시대는 제국의 말기의 징조가 곳곳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제국의 판도는 최대로 키웠지만 무력으로 인한 재정의 적자는 다음 세대에 큰 부담을 안겨주고 유럽 열강 중 영국이 등장을 하게된다. 아우랑제브 시대는 워낙 국력이 왕성할 때여서 영국이 감히 넘보기 힘들고 무역을 해달라고 청원을 비는 판국이었다. 나중에는 노골적인 침략을 하게 된다
아우랑제브는 이슬람의 광신적인 형태를 보였다. 결국 아우랑제브에 대항해 1674년 시바지가 힌두교도 호족들로 이루어진 마라타 왕국(마라타 동맹, 1674 ~ 1818)을 건국하였고 이들이 나중에 무굴제국의 기초를 무너뜨리는 단체가 되었다. 이외에 시크교 세력이 힘을 모아 시크 동맹(1716 ~ 1799)을 결성하고 반란을 일으킴과 더불어 시크 왕국(1799 ~ 1849)을 세우고 라지푸트족의 소국, 자트족의 소국들, 아와드족 세력들까지 난립하면서 인도의 넓은 대륙은 델리 근처 외엔 이미 무굴제국의 힘이 미치지 못하였다. 그런 가운데 인도 내부가 아닌 페르시아 방면에서 온 아프샤르 왕조의 전투 괴물 나디르 샤는 1739년 델리에 입성하여 무력한 무굴제국에 살육과 약탈을 하여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이 나디르 샤에 의한 침공은 무굴제국의 200년 동안 모은 부를 단 며칠 만에 털어버렸다고 한다.
이들 보다도 사실상 더 위협적인 세력은 서쪽에서 그리고 바다 건너서 왔다. 유럽 쪽에서 내부적인 패권다툼을 완수한 다음 드디어 인도로 마수를 뻗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전에는 포루투갈이 부분적으로 바다 쪽에만 도시 정도의 단위로 몇몇을 지배하고 있었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인도의 통상권을 차지하기 위해 7년 전쟁을 치럿고 플라시의 싸움 ( 1757년 )에서 영국은 프랑스를 물리치고 인도의 독점적인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다. 곧 무굴제국 말기의 혼란기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하나씩 하나씩 인도 여러 지역을 야금야금 먹어 들어갔고, 19세기 중엽 《 세포이의 난 》이 일어나자 그 구실로 난을 진압한 후에 완벽하게 인도 전체를 통치하게 된다.
이때부터 인도 전역은 식민지 시대로 들어갔던 것이다.
1947년 인도가 독립되고 파키스탄과 분리되었다.
인도 카스트제도
인도의 가장 장점은 종합력에 있다, 이 말은 유연성과 흡수성과도 통한다. 어쩌면 인도는 모자이크 그림과 유사하다. 모자이크는 가까이 보면 수많은 조각이 틀리지만 멀리서 보면 하나의 틀을 완성하여 그림이 된다.
이러한 명제를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 독특한 신분제도인 카스트 이다. 카스트란 용어는 포르투갈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고 인도인들 스스로는 쟈티 또는 바르나 라고 한다. 포르투갈의 카스트는 일종의 계급이란 이미지가 강하지만 쟈티는 일종의 자리란 뜻이다. 무릇 인도인이라면 자기 자리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통칭 카스트는 승려계급인 브라만, 무사계급 크샤트리아, 일반 농부나 서민인 바아샤, 그리고 노예인 수드라 로 4계급으로 나누지만 그것은 피상적일 따름이고 실질적으로 3000개가 넘는다고 한다. 이외에도 카스트 자체에도 끼이지 못하는 힌디어로는 달리트 혹은 하리잔(불가촉천민) 집단도 있다. 그들은 자리가 없는 것이다.
인도에서 카스트제도는 법적으로 폐지됐지만 그 문화는 여전하다.
평소 인도인은 외국인을 얕보진 않는다. 그렇지만 결국은 외국인은 이론적으로 카스트 계급에도 못 들어가는 불가촉천민인 것이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항상 그 불가촉천민에게 지배를 당한 것이 인도의 역사이다.
카스트는 차별제도인 점도 있지만 그것만으로 해석을 하면 곤란하다. 만일 이 불평등한 듯한 카스트를 타파하려고 하는 어떤 뛰어난 인물이 나타났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 인물은 결코 카스트를 부수지는 못하며 오히려 그런 사상을 가진 새로운 카스트의 탄생을 뜻한다. 그리고 인도북방부에서 끊임없는 이방인들이 침공해 들어 왔지만 그들은 인도에 머물면서 새로운 인도사회에 적응하며 그들의 새로운 카스트가 되며 정착을 해왔다. 흔히 왕후장상에 씨가 따로 있냐? 고 하지만 인도는 씨가 따로 있다고 믿는다. 즉 만인이 똑같은 인간이라는 사상이 아니고 너와 내가 틀린다는 사상이 바로 인도인의 사상이다. 그것이 카스트란 제도로 표출이 된다. 또한 카스트는 단순히 차별적인 것이 아니라 자체적인 직업군으로서 보호막이기도 하다. 만일 브라만 중에 한명이 상인카스트 중의 한명을 모욕을 했다고 치면 전체 상인카스트는 그 브라만이 사과할 때까지 가게를 전부 문을 닫고 보이코트를 한다.
힌두교
힌두교란 명칭도 또한 이에 대응하는 힌두어의 단어는 없다. 서양, 특히 영국에서 인도를 지배하면서 인도인이 믿는 종교라고 해서 힌두교Hinduism라 불렀을 따름이다. 인도인은 힌두교를 믿는다고 의식하지 아니하며 스스로의 종교를 영원한 다르마라는 뜻의 Sanātana Dharma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서양인 믿는 종교의 관점에서 힌두교는 한마디로 정의가 불가능한 종교이다. 그리고 넓은 의미에서 바라문교· 자이나교· 시크교, 불교 등도 힌두교에 속한다고 할 수가 있다. 인도인이 믿는 종교이니깐. 또한 힌두교는 여러 신들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 다신교적 일신교로서, 특정한 종교적 창시자가 없다. 인도란 장소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났다. 일반적으로 힌두교라고 할 때는, 민간 힌두교 전통과 베다 힌두교 전통으로부터 비슈누파와 같은 박티 전통에 이르기까지, 위의 타 종교들을 제외한 여러 다양하고 복잡한 전통들 전체라 말할 수 있다. 이 일반적인 의미의 힌두교에는 또한 요가도 포함되며, 카르마 개념에 기초한 매일의 도덕적 삶과 힌두 결혼 풍습과 같은 사회적 일반 규범도 힌두교의 일부이다. 믿는 신만 해도 세기도 힘들고 숭배하는 동물도 수없이 많다. 신과 인간, 그리고 숭배하는 동물과 경계도 희미하다. 정말 강력한 자율에 있다. 종교도 그렇고 언어도 10마일만 벗어나면 달라진다고 한다.
중동의 자매종교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는 철저한 유일신이고 인도는 다신교인데 지리적으로 중간의 페르시아(이란)에는 이二신교 ( 조로아스터교 )가 있는 것이 흥미롭다
인도는 역사적으로 그 거대한 땅덩어리가 통일이 된 적은 극히 짧은 순간이 많았다.
이것이 같은 거대한 넓이라도 중국과 다른 점이다. 중국은 통일된 시기가 훨씬 분열된 시기가 길었던 것이다. 중국은 이민족이 침입을 했을 때 그들을 유불선儒佛仙사상으로 흡수를 시켰지만 인도는 독특한 카스트 제도와 힌두교로 그들을 변질을 시키고 흡수를 시켰다. 인도인들도 인도라는 국가의 정체성을 거의 의식을 못할것이다. 심지어 마을마다 틀린 세상과 색다른 카스트와 언어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힌두교란 자율이 인도라는 잠재된 통일을 이루고 내려왔다. 오늘날 인도란 땅의 정체성을 확립된 것은 인도 자신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군사적으로 물리적인 가장 넓은 통일을 한 외부의 힘에서 왔다. 무굴제국에 이어 지배한 바로 영국이다. 아마 인도주민은 영국으로 인해 자기 국가를 비로소 깨달았을지 모른다. 즉 영국의 통치가 비로소 인도인이란 정체성을 가져다 준 가장 강력한 경험이었던 것이다.
영국의 침입 이전에는 이슬람의 침입이 인도인에 가장 영향을 주었다. 모든 종교 중에 가장 확고부동한 유일신이며 신 앞에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이슬람인데 다양성과 공존이 가능한 힌두교와 가장 대척적이라 이로 인해 인도의 근세사는 큰 변화를 겪게 된다. 힌두교의 유연함과 종합력은 이슬람의 유일성의 단단함에 크게 찔리게 되는 것이다.
영국이 통치하기 전까지 인도에는 通史를 쓰기가 아주 힘들다. 워낙 다양한 나라가 수없이 없어지고 새로 생겨나고 또한 외부에서 침입해 들어 왔다. 또한 북부와 남부는 인종에서부터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일반적으로 세계의 역사에서 인도라 거론이 되는 것은 주로 북부 지역을 이야기한다. 북부는 수많은 외부 종족의 침범으로 부대끼면서 힌두교와 카스트로 흡수시키고 하는 동안에 남부는 극히 메마른 데칸고원의 사막이 천연의 방비벽이 되어 큰 변화는 겪지 아니하고 내려왔다. 북부는 주로 아리안계이며 언어도 인도유럽어 계통이라면 남쪽은 주로 드라비다 족으로 역사에서 가장 먼저 인도 땅의 주인공이었다. 남부의 드라비다족은 흑인종에 가깝다고 한다.
인도의 종교관
인도의 종교관은 한마디로 일신론이 신에 의지하고 믿는데 반해 개인적인 수양이 목적이 많다. 불교와 힌두교 그리고 자이나교 또한 마찬가지이다. 다른 종교와 달리 적극적인 다른 단체에 포교를 하지 아니한다. 개인마다 마을 마다 카스트 마다 각기 나름대로의 방식이 있고 사상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다른 단체적인 성격이 강한 종교와 틀린 점이다.
인도의 쿠산 조 시대에 《 나가르쥬나 》란 사람이 나타나 [ 대승불교 ]를 주창했을 때 이 정신은 이른바 여태와 달리 혼자 가자가 아니고 같이 가자는 정신이다. 대승( 大乘 )이란 큰 수레란 뜻으로 같이 도를 닦자는 것이다. 이 대승불교는 인도 자체 보다도 중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에 퍼졌는데 그것은 인도의 기본풍토와 맞지 아니한 점이 많았던 까닭인 것이다. 대승불교를 주창한 사람들은 본래의 인도의 불교가 작은 수레에 ( 小乘 )에 얷매어 있다고 생각해서 소승불교라 폄하를 하였다.
앞서 수많은 이슬람 왕조의 침공을 이야기했는데 이슬람은 세계의 큰 세력의 종교 중에 가장 획일적이고 튼튼한 바탕의 전체주의적인 성격이 짙은 종교인데 이것은 힌두교와 아주 대척적인 관계라 할 수 있다. 기원 11 세기 부터 기원 16세기까지 수많은 이슬람 왕조는 사실상 인도의 북반부를 대부분 지배를 하였다. 최후의 힌두왕조( 촐라 왕조 )는 16세기에 완전히 멸망을 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튀르크 계열의 이슬람 왕조는 인도를 완전히 이슬람화를 거의 시키지 못했다. 첫 번째 이유가 힌두교 그리고 인도 자체의 유연성과 흡수성으로 아무리 찔러도 일부만 흡수하고 변질시켜 인도 사회에 정착시키는 힘 때문이다.
두 번째는 무갈 왕조가 나타나기 전까지의 이슬람 왕조들은 통치 기간이 짧았는데다가 술탄들의 힘이 전국적으로 미치지 못하였고 수시로 분열이 되어 군사적으로만 지배를 했었고 문화적으로 지배는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이슬람 왕조가 이슬람화를 시킬 때 개종한 인도인은 대부분 불교도였고 힌두교는 거의 그대로였다. 불교는 남방의 실론 섬 만 살아남았다. 그것은 본래 불교도가 지배를 하다가 (싱할리족), 힌두교 (타밀족)들이 침공했지만 잘 선방을 하여 지배권을 확보한 것이 여태 스리랑카가 불교국인 이유이다.
징기스칸이 세계를 휩쓸고 난 뒤에 후계 왕국이 곳곳에 생겨났는데, 특히 몽골 보다도 몽골과 혼합한 튀르크 계열의 왕조들이 정복자로서 많이 나타났다.
티무르는 이름은 분명 몽골식 이름이고 또한 징기스칸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하지만 조금은 의심스럽다. 여하튼 티무르는 징기스칸 이 후에 가장 넓은 영토를 정복한 전쟁광이었다. 평생 패배를 몰랐다고 한다. 상층부는 몽골과 혼혈, 그리고 하부는 튀르크 계열이라 할 수 있다. 인도를 침공했던 정복자 티무르가 죽자 신속하게 광대한 제국은 분열이 되고 마는데, 그 중 티무르의 손자 중 한명의 이름이 《 바부르 》이고 그가 무갈 제국의 창시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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